[단문] 2001년 습작시 2005.07.02 12:15 

비바람나무

비가 불고 바람이 내렸어요 잿빛 구름이 잿빛 거리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어요 나무들이 방정맞게도 까르르 까르르 몸뚱아리를 흔들어댔어요 손이고 팔이고 할 것 없이 제물 없는 굿을 지냈어요 하늘의 반대편에서 흙덩이를 움켜쥐던 또 다른 손들도 어젯밤엔 주먹 대신 보를 냈을 거예요 저는 땅 위 사람이라 또 다른 손들을 못 보았지만 땅 아래 개미들에게 물어보면 알 거예요 하지만 이 도시에 얹혀 사는 개미들은 거진 땅 위에 사는 불개미들이에요 아파트 이십층에서도 쌩쌩한 불개미들이에요 그러니 나무들에게 직접 캐물어 봐야겠어요 그네들의 치부를…… 하릴없이 나무는 왜 보았냐고요 언제 오나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오라는 사람은 아니 오고 꽃 떨어진 벚나무랑 아직 손이 작은 은행나무만 보였어요 저더러 보라고 춤까지 덩실덩실 추어댔어요 얼마나 추어댔으면 빗물 따라 팔이 불었을까요 바람 따라 손가락이 투두둑 떨어졌을까요


습작에 대하여

바리게이트를 뚫는 무언가가 있다
목구멍으로 토해내는 속엣것
양철 창문에 갇힌 골방의 밤
테이블 위, 방종 끝에 선 말들
저열한 단어들이 백지를 욕보일 새
내 목소리는 추하며
내 말은 너절한 나르시시즘이며
내 글은 수치를 모르는 교만과 자폐
따끔하게 찔러 넣는 모멸에
클로즈업되는 양철 창문
지금 지껄임은 피동형인가 능동형인가
주어는 어디에 목적어는?
말은 말로 인해 더욱 난해하다
내뱉는 쓰레기는 소각장으로
굴뚝을 기어올라 흩어지는
밤 양철 창문 쓰레기 또 굴뚝
휘도는 현기증 또아리 틀고
자욱한 골방을 바람이 두드릴 때
쓰레기통엔 쓰레기를 쑤셔넣는다
굴뚝도 창도 없이 사면초가인 덩어리를
그래 보았자 三流라
향기 진한 꽃,
독기 서린 뱀, 낳지 못해도
닳은 연필심 가다듬어
다시 날카롭게 세울 일


밤바다

검은 바탕에 등대 불빛이
달빛보다 가까운 밤
고깃배는 산파였다
늘어뜨리고 끌어올리며
만삭의 바다 품에서
태어나는 고기떼를 그물로 받는다
온 물결 물결이
밤새 산고(産苦)에 몸부림칠 때
멀리서 나는
모래 위로 흩어지는 머리칼을
헛발길질로 놀리고 있었구나


고해성사 6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바람이 책을 읽고 있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재미있다는 말인지
시시하다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책을 빼앗아들자
그대로 스쳐가서는
다시 낙엽을 세고
나뭇가지를 세고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도 섞여들고 싶어할까
만나는 것들마다 쓰다듬고 싶어할까
바람이 부러워
어미 잃은 잎새와
자식 잃은 가지와
침묵한 얼굴들을 세었다


고해성사 9

열 두 살의 봄에 아이는 집을 지켰다. 여덟 아홉 열 살의 봄에도 집을 지켰다. 라면으로 달래는 출출함, 천장바라기로 달래는 쓸쓸함. 천장바라기도 지겨울 때면 비둘기로 변신하고 싶었다. 창구멍에 새가 보이면 녹슨 창틀에 새가 앉으면 아이는 말을 걸었다. 내게도 날개가 생길까. 착하게 끄덕이던 하얀 비둘기.

열 세 살의 봄에 아이는 브래지어를 했다. 겨드랑이도 자글자글 가려웠다. 날개 돋음의 신호, 탈출을 명령하는 신호. …… 순백깃털의 희망에 달뜬 몸은 거울 앞에서 거울처럼 차가워졌다. 부끄러운 살 속에서 돋아난 놈은 비둘기 하얀 깃털이 아니었단다. 갇힌 심사(心思)마냥 시꺼멓게 우그러진 잡초였단다.

두 번 다시, 집 지키는 아이는 장래희망란에
-새-
라고 쓰지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모든

그들은 풍경처럼 흘러간다
거리에 버스에 카페에
이름들을 몰라 '그들'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들은
패러디영화의 배경처럼 가고 오고 스치고
돌아서고 안녕!

잘 봐
그들 속에 나도 있어
그런데 내가 누구지?

삼류소설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얼굴들을 하고서
엑스트라 주제에!
속눈썹 하나라도 떨어질까 조심스럽게

풍경인척 하다가 정말로 풍경이 되어버리는.


죽은 가수의 노래

멈춰야 할 때가 있다
빨간 불일 때
친구와 마주칠 때
그리고

죽은 가수의 노래가
노래상자에서 흘러나와
거리거리를 휘감을 때

걸음도 잊고
말도 잊은 채
머릿속 앨범을 펼쳐야 할 때가 있다
우상의 노래를 사랑했던 소녀를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붙잡고 으쓱대던 소녀를

그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노래를
그 여자의 기억을 다듬질하는 노래를


거리에서

활자들 틈에서 방향을 잃고 뛰쳐나가면
눈앞에 수 갈래 길이 꿈틀대는가
길은 집으로 길은 상가로 길은 우체국으로
그중 한 길을 고르기도 어렵거니와
한발이 중력에 항복해 엎드리면
다른 발은 중력에 대항해 떠오르니
제자리일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가
이렇듯 헤매는 가슴에 잔바람 일으키는
수많은 발걸음들 사람들도 보이는가
걸음걸음 흔들리는 저 어깨들은 그리움을 향하는가
혹은 그리움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일제히 달아나는가
서두를 일과표가 없는 내 두발조차
물결물결에 전염되어 줄달음치려 하는가
이렇듯 헤매어 흐느끼는 거리에서
눈앞에 수 갈래 길과 수 갈래 발걸음을 읽으면
한눈으로는 볼 수 없는 내가 보이는가
방안에 갇힌 활자들 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차건 공기 속 뜨뜻한 입김이 보이는가


취객

저들의 비틀거림은 술 탓이 아니다
역삼각형의 몸뚱이들,
하늘보고 수직으로 꿈을 벌릴수록
발걸음은 위태롭다
고래고래 세태한탄도 하고
흘러간 유행가도 불러보지만
그럴수록 짓궃게 흔들려
마침내 쓰러진다

서넛이 팔짱낀 무리에서
한 사내가 이탈한다
사내는 길다란 수직에 기댄다
전봇대 혹은 가로등,
땅을 딛고 직립(直立)한 꿈이
저 꼭대기에서
구역질을 살피고 있다

수직은 지켜보고만 있다
불빛은 달아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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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원북 2010.12.03 22:14 신고  re x
    시 쓰시는 분인가 봐요. 작품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를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

  2. 2011.08.20 10:41  re x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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